첫 만남부터 돌이켜보자. 작년 늦봄, 문학편집자 윤 씨는 만화(애니메이션까지 통틀어)를 너무너무 좋아한다던 내게 만화편집자 김해인 씨를 소개해주겠노라 말했다. 만화편집부라는 부서에 막연한 환상을 품었던 나는 ‘그 편집자님’은 어떤 사람인가 물었고, 윤 씨는 곧장 답해주었다.
“그…… 만화의 수호자 같은 사람이죠.“
오랫동안 ‘덕친’ 없이 지내왔다. 간혹 나와 비슷한 농도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긴 했지만, 서로의 교집합이 좁거나 희미했기에 몇 마디 추상적인 찬사(아, 그 작품 정말 좋죠!)만 늘어놓고 끝나기 일쑤였다. 홀로 만화를 좋아하는 일은 가능했지만, 거기서 비롯된 열정을 다방향으로 파생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무엇인가에 열정을 태우는 일에도 동료는 중요하다. 괜히 유럽 초현실주의자들이 다다를 꾸리고, 근대 문인들이 동인 형성에 몰두하며, 타인이라면 치를 떨었을 게 분명한 누벨바그인들이 함께 잡지를 만든 게 아니다. 동료란 실재하지 않는 우주를 함께 탐구하는 자들이자, 그 관계에서 또 다른 우주가 탄생하기도 한다.
어쨌건 만화를 사랑하는 일에 동료가 생기리란 희망은 거의 접고 있던 나는 미지근한 기대감을 품고서 식사 자리에 나갔다. 우리는 회사 앞 퓨전 레스토랑에서 볶음밥과 빠네를 앞둔 채로 나란히 앉았다. 실은 슬쩍 긴장해 있었다. 만화의 수호자라……‘수호자’ 같은 명칭이 붙은 사람에겐 잘 보이고 싶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해인 씨가 내게 “좋아하는 만화가 무엇이세요?”라고 물은 순간, 나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안전하게 고전(불새, 유리가면, 슬램덩크)이나 명장(데즈카 오사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댈까. 아니면 일단 가장 대중적인 작품(원나블, 헌터×헌터, 혹은 『파티』와 『이슈』의 전성기 시절 만화들)들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나…… 치열하게 고민했건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 건 다른 만화의 제목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읽던 만화로, ‘불사신’이란 별명이 붙은 사나이가 아이누족 소녀와 함께 금괴를 찾아 나서는 모험을 다룬 작품이었다.
내가 『골든 카무이』의 이름을 대자 해인 씨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쳤다. 직전까지 피로해 보이던 얼굴이 총기로 빛났다. 우리는 잠시 『골든 카무이』가 지닌 변태성과 역사의 틈새를 파고드는 장면들, 거기 나오는 인물들의 괴상함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나눴으며… 곧바로 다음 점심 약속을 잡았다.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다. 그간 우리는 수많은 점심을 함께했다. 서로의 사생활(“주말에 뭐했냐고요? 만화 봤죠……”)을 얼마간 알게 됐고, 서로 좋아하는 만화(“그 작가가 저를 키운 거나 다름이 없거든요”)에 대해서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정보를 나눴다.
해인 씨를 알게 될수록 나는 왜 윤 씨가 그를 ‘만화의 수호자’로 불렀는가 깨닫게 됐다. 그것은 만화를 향한 그의 경계 없는 사랑을 뜻하는 호칭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가리지 않고 온갖 만화를 먹어 치웠다. 이왕 태어난 생애 각국의 별미는 해치우고 가겠다는 욕망을 품은 미식가처럼. 그에게 나쁜 만화는 있어도, 무의미한 만화란 없어 보였다. 순정만화와 액션만화, 청년만화, 아동만화, 직업만화……해인 씨는 반평생 『슬램덩크』의 시합을 마음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닿기를』로 순애를 익혔고, 『주술회전 0』을 보면서는 또 다른 순애의 정의를 배웠다. 그는 종종『데스노트』와 『강철의 연금술사』 속 사랑하던 인물들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종로 어딘가에서 이 눈물을 목격한 나는 놀라고도 즐거워 펄쩍펄쩍 뛰었다) 흘리는 사람이었다. 『월간순정 노자키군』의 세계에 살고 싶으면서도 『기생수』의 감수성만은 영원히 놓지 못할 사람이기도 했다. 만화에 관한 한 그는 확고한 박애주의자였고, 점심시간은 그 사랑의 물결을 탐구하기에 늘 짧았다.
‘덕친’과의 관계에는 어딘가 연애 같은 면이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어느 작품과 사랑에 빠질 때나 어떤 작품으로부터 상처받은 순간, 이 경험을 ‘해인 씨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온 날도 마찬가지였다. 요동치는 심정을 어디에도 바치지 못하고 헤매던 나는 해인 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영화 보셨어요?" 잠시 후 답이 왔다. "제가 코로나에 걸려서 오늘까지 격리중이라…" 몰랐다고, 미안하다가 답하려는 순간 다음 답이 왔다. "그래서 내일 보러 갑니다."
그다음 주,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한 시간 동안 그 영화가 우리에게 준 환희와 상처를 이야기했다. 20세기 청소년들의 농구 경기가 어째서 이토록 현대인의 감각을 파고드는 건지, 혹은 영화가 지닌 선명한(일본에서 나온 비평처럼 이 작품은 아직 ‘실패 이후’의 삶을 충분히 그리지 않았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왜 그 허구의 ‘승리’에 애착을 품을 수밖에 없는지. 얼마 후 해인 씨는 사무실 책상에 송태섭의 그림을 붙여놓고 내게도 몇 장을 건넸다. 새로 이사 온 집에 부적을 건네는 이웃 같은 태도였다.
‘덕친’은 동료로서의 의리가 가장 돋보이는 관계이기도 하다. 해인 씨가 추천한 사쿠라이 가몬의 『아인』을 부리나케 읽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서로가 만화에 애정을 품었음을 드러낸 순간 우리는 느슨한 계약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계약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선 상대에게 계속하여 좋은 작품을 추천해야 하고, 반대쪽도 그에 마땅히 응해야 한다. 물론 『아인』은 읽는 내내 내 마음을 동동 구르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 진폭의 원인을 알려면 누군가와 오래 대화를 나눠야 했다. 나는 얼른 다음 약속을 잡았다.
우리의 대화는 다음 질문으로 자주 열린다. “최근 뭐 읽었어요?” 그것은 결국 당신이 어떤 순간 세상과 사랑에 빠지느냐는 물음이다. 각종 만화가 오랫동안 던져온 질문이기도 하다. 칸과 선, 말풍선과 효과음, 그리고 움직이는 그림들로 만들어낸 질문들. 만화는 여전히 내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모습 그대로, 타인의 마음을 그리고 삶을 직조한다. 그러므로 ‘덕친’ 간의 대화는 우리가 읽어온 마음과 삶이 신체의 어느 부위를 찔렀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어떠한 새 세포를 가져왔는지 얘기하는 일이다. 상대의 몸이 꾸준히 자라는지 확인하는 일이며, 함께 만든 세상을 지켜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얼마 전 스쿠터 뒷좌석에 해인 씨를 태우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그는 최근 『헌터×헌터』에 빠져 있다는 얘기를 늘어놨다. 그가 내 최애를 묻기에, “키르아와 크라피카”라 답했다. 해인 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는 크라피카를 보면 김수겸이 생각나요.” 나도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둘 다 마초의 영혼이 깃든 미인들이니까요……” 그를 데려다주는 길에 나는 해인 씨의 우주를 그려보았다. 과속방지턱이 나올 때마다 함성을 지르고 휴즈와 엘의 죽음엔 눈시울을 적시는, 내 동료의 속내에 펼쳐져 있을 그 세계. 그러니까 불사신과 마초 미인들, 순정만화의 커다란 눈동자들과 직업만화의 땀방울로 엮여 있을 우주에 대해서…… 그러자 왜인지 배 속은 편안해졌고, 우리는 곧 다음 약속을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