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로서 매년 국내 최대 규모의 북페어인 서울국제도서전과 2009년부터 시작해 10년을 훌쩍 넘긴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방문한다. 만화편집자로선 2차 창작이 주가 되는 ‘디페스타’와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페어인 ‘AGF(Anime Game Festival)’에도 종종 가곤 한다. 이처럼 국내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들을 다니며 느낀 것이 있다면, 어디를 가도 ‘한국 오리지널(1차) 만화’가 주인공인 행사는 없다는 것. 그래서 그럴까? 만화에 관한 것이라면 전방위로 활동중인 란탄 작가가 독립출판만화 판매전 ‘칸새’를 연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그를 찾았다. “칸새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그리고 그 물음과 답에 도착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편집자(이하 편): 작가님은 유튜브, 팟캐스트, 행사 기획, 책 제작, 유통, 출간과 같은 일 등 ‘만화’에 관한 것이라면 홀로 많은 것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란탄(이하 란): 만화 관련 온갖 기획과 그에 따른 작업들을 하고 있는 란탄입니다. ‘만화가 란탄’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편: 역시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만화 창작이신가요?
란: 네, 그런데 어쩌다가 이것저것을 하고 있네요.
1. 결국 돈, 돈!
편: 같이 해도 어려운 일들을 ‘혼자’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계기부터 애로사항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란: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합니다. 물론 혼자가 편해서 하는 이유도 있어요. 옛날에는 출판사에서 만드는 만화잡지라는 것이 있었잖아요? 아마추어나 동인행사에 가면 창작지와 앤솔러지가 있고, ‘새만화책’이라는 출판사도 있었고. 근데 이젠 독립만화 이야기를 해보자고 어디를 가도 그런 일들을 하셨던 선배들이 없어요. 행사든, 앤솔러지든, 작가든, 돈이 안 되니까요. 이전의 1차와 독립 창작활동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하는 활동들 덕에 크라우드 펀딩 회사에도 2년 정도 다닌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혼자서 해봤자 잘 안 되더라고요. 저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만화판 자체가 돈이 안 되니까요.
편: 시작부터 돈 이야기가…… 근데 맞죠. 사실 돈이면 해결되는 게 많죠.
란: 팟캐스트 할 때 창작분들께 고민을 모집했는데, 돈 관련 고민이 너무 많아서 다른 고민을 듣고 싶었어요. 결국 돈, 돈! 오늘도 돈 말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왔어요.
2. 독립이 뭔데?
편: 작가님께서 오늘 ‘독립’과 ‘1차’라는 두 주제를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하셨죠. ‘독립만화’라는 게 뭔지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를테면 대형 웹툰 플랫폼 대신 포스타입 같은 곳에서 연재하는 게 독립만화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도 결국 포스타입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하는 거고, 종종 인기를 얻은 작품은 오픈 플랫폼에서도 푸시를 해주잖아요. 익명사이트에 거칠게 그린 만화를 올리다가 출판사나 플랫폼에서 연락을 받아 정식 연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럼 그 작품들은 독립만화였다가, 독립이 아니게 되는 건가?
란: 그건 또 아니긴 하죠. 출판사의 편집자라 그러신지 ‘유통구조’를 살피시네요. 확실히 독립이냐 아니냐가 거칠고 크게는 유통에 따라 갈리는 것 같고, 그 이상의 정의를 내리기 애매한 상태긴 해요. 오픈 플랫폼이 그 정의를 내리기 더욱 어렵게 만든 듯하고요. 이야기하다보면 이것도 만화고 저것도 만화라서 그래요. 웹툰도 만화고 독립 제작한 만화도 만화죠. 그런데 형식이나 유통구조 등을 나누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린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혹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구분 짓는 경우도 있고요. ‘독립만화’를 논의하기 위한 구분은 필요한 것 같아요.
편: 오픈 플랫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란: 마냥 기회로 보이진 않는다? 그곳도 역시 노출도와 수치에 의해 등락이 나뉘는 구조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또 엄청난 큐레이션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독립 어쩌구 하는 사람들이 독불장군이 되는 게 (제가 요즘 ‘한 먹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거든요?) 내 만화가 메이저 감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픈 플랫폼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봐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한 먹는 거 같아요.
편: 미학이나 연출로서 보자면 독립만화엔 확실히 ‘작가주의적’인 인상이 있습니다.
란: 작가로서도 독립만화에는 실험적이고 작가의 내면적인 이야기가 중심이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1차’라고 불리는 작품에는 일본의 망가 영향을 크게 받은, 아마추어 오타쿠의 창작물이라는 인상이 있고요. 독립과 그것이 아닌 것을 뚜렷하게 가릴 수 없는데 아무튼 ‘독립’ 자가 붙으면 남다른 것이라고 여기고, 읽는 사람들도 그리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독립창작물은 나쁘게 말하자면 치밀한 기획이 없어요. (편: 네???😲) 상업을 위한 기획보다는 본인이 그리고 싶어서 그린 게 많아요. 일단 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 라는 목적으로 내는 만화들이 무척 많습니다. 좋게 말하면 만화라는 것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뛰어들어서 그린 거죠.
3. 독립의 자격?
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독립만화라는 게 결국 아마추어와 연결이 돼요. 프로, 아마추어 할 때 아마추어요. 독립이라 부르는 판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 활동했어도 본인이 자격을 못 갖추었다,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자격지심이 큽니다. 저도 그렇고 주변에도 그렇고.
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물음표가 떠오르는 게 있는데, 대체 그 자격과 인정은 누가 부여하는 것이길래 그러는 걸까요?
란: 제 말이요!!! 만화는 선언이에요. 윤태호 만화가님이 예전에 “‘내가 오늘부터 만화가’라고 하면 그 사람은 만화가다” 그런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하신 적 있거든요? 만화가라고 하면 다들 만화가가 되는 거예요. 제가 마이크 잡고 독립만화를 한다고 발언이나 활동을 많이 하니까 이런 연락들이 디엠으로 많이 와요. ‘저도 독립만화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제가 독립만화를 해도 될까요?’. 이런 메시지 받으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지?’ 싶어요.
편: 작가님이 만화가 자격증 같은 걸 발급해주시는 것도 아니신데 말입니다.
란: 그래서 제가 정말 곰곰이 생각을 해봤죠. 이분들이 왜 이러실까? 그리고 깨달았어요. 이분들은 ‘응원’을 받고 싶은 거예요. 너는 만화가라고, 네가 그린 것도 만화라고요.
편: 값진 돈오의 순간입니다. 이해는 십분 가요. 이 판이 너무 작고 독자 수가 얼마 없으니까 작업물에 대한 반응을 얻기가 어렵잖아요. 세일즈나 수익으로든, 평가나 감상으로든. 자기가 하고 있는 작업과 그 결과물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확인할 수 없으니 그러신 것 같아요.
란: 어려운 현실이지요. 어떤 창작자든 응원과 격려가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그에 앞서 독립 작가로서의 자긍심이 있기를 바라요. 잘 안되지만! 어렵지만! 그럼에도!
편: 저도 오리지널 출판 원고를 개발하고 책으로 내는 입장에서 재미와 보람도 크지만 쉬운 일은 아니라고 느껴요. 실제 그리고 있는 창작자로선 어떠신가요?
란: 저도 전망이 좋은 시장이어서 뛰어든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출판 쪽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독립 작가는 손에 꼽고, 오픈 플랫폼에서도 지속하시는 분이 적죠.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구현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니까요. 그릴 때는 늘 고민을 하죠. 결국은 플랫폼을 경유하지 않으면 작가가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 건가? 정말 만화가가 혼자서 할 수 있는 돌파구는 없는 건가? ‘독립’이란 것이 작가들의 등용문이나 상업으로 향하는 예비군인가? 그 단어를 달고 출판사나 플랫폼의 간택을 기다리는? 그런 의문들로요. 이 의문에 답을 내리지 못해서 계속 ‘독립’이란 단어를 메고 있는 것 같아요.
편: 그러면 작가님은 왜 만화를 그리세요?
란: ……그거 진짜 어려운 질문인 거 아시죠? 마치 좋은 만화는 뭐냐 같은…
편: 알죠, 죄송합니다… 전에 어떤 작가님께서 만화로 돈 벌 생각은 없고(벌릴 만한 만화를 그리고 있지도 않으며) 일러스트나 외주 작업으로 돈을 번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거든요. 그리는 입장에서 현실을 알기에 철저한 자가 진단을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지금 작가님들과 원고를 함께 만들고 있고 그걸 책으로 만드려는 입장으로서 그런 생각이나 말은 하지 않으려고요. 하면 안 돼요. 돈 안 되는 거 아는데, 맞는데,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된다고요! 적어도 그 판에 있는 편집자가 그런 이야기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란: 저는 꾸준히 이 바닥, 이 판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이런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독자도, 창작자도 늘 일정 수는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예요. 그러면 해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왜 만화를 그리냐는 물음에, ‘그리고 싶어서 그린다’…라는 말밖엔 할말이 없어요.
편: 와. (입 틀어막음)
란: 살면서 그때그때 드는 생각이나 정념이 있습니다. 이건 말로 해소가 안 되고요, 그리던 습관이 있어서 그냥 만화로 그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것입니다.
편: 방금 그 말, 저희 인터뷰에 꼭 필요한 이야기였습니다. 완전 소년만화 같았어요.
4. 독립의 재미?
편: 독립만화가 상업성과 반대 위치에 있다는 인상도 있죠. 보통 상업성과 반反한다고 하면은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고요. 독립만화가 재미없다는 이야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란: 편집자님은 원고를 살피는 일을 하시잖아요. 재밌는 만화에 대해 정의할 수 있으세요?
편: ……그거 진짜 어려운 질문인 거 아시죠? (아까 작가님이 하신 말 그대로)
란: 재미란 게 진짜 어려워요. 재밌는 만화란 무엇이냐고 이야길 시작하지만 그게 딱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결국 ‘그 시간에 만화 한 장이라도 더 그리자!’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만화 한 장이라도 더 읽는다든지요. 독립만화에서 상업적인 재미를 찾기 어려운 건 맞습니다. 그래도 독립만화가 자아내는 독자적 재미는 있다고 분명히 생각하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독립, 인디, 마이너를 찾는 거고요.
편: 독립만화에서 소위 상업적으로 히트를 치기 위해 기획되고 치밀히 제작되는 작품들의 재미를 찾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독립만화는 그런 재미를 상정하고 그리는 게 아닌데.
란: 맞습니다. 전 ‘서드플레이스(디페스타의 전신)’나 코믹월드에서 창작지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때도 많이 팔리지 않았어요. 많아봤자 몇십 권? 옆에서 2차 창작으로 몇백 권씩 파는 분들을 부러워했죠. 애초에 타깃이 다르고 시장이 다른 것이었는데 부러워하는 게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시간이 지나서야 했어요.
편: 그다음으로는 ‘작품성’이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상업성과 작품성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저는 그 두 개는 반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 생각해요. 이전의 작품에서 찾아보면 천계영 작가님, 요즘 웹툰은 <집이 없어>나 <가비지타임>, 『기생수』와 『히스토리에』의 이와아키 히토시 만화 역시 누구도 이견 없을 것 같습니다. 고단샤의 월간만화잡지 《애프터눈》은 아예 다양성과 작가주의적 작품을 우선하면서 ‘이런(다양한) 만화를 그리는 작가도 설 수 있는 곳’이라고 잡지 정체성을 표방하더라고요. 영화 쪽엔 류승완 감독님도 있고요. 또, 아까도 말했지만 상업성과 작품성을 갖고 있는 독립만화가 잘되는 경우를 보기는 봤잖습니까? 오픈 플랫폼에서 시작해 카리스마적 작가의 작품과 행보에 큰 팬덤을 얻고, 대형 웹툰 플랫폼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정식 연재를 하게 되는 케이스요. 다른 이야기지만 솔직히 혼자 시작했지만 그런 제안이 왔을 때 거부할 수 있는 작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란: 전 그렇게 자본을 가진 기업과 독립 제작자를 이분화하는 의견이 다소 의아합니다. 자본을 들였다고 엄청나게 재밌는 만화가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애초에 제작 초기에 그만큼의 자본을 들인 한국만화가 있긴 한가 싶습니다만…) 오픈 플랫폼이나 익명 사이트에 올라오는 대충 그린 만화라든지, 케쟝님과 마사토끼님의 만화도 엄청 재밌고요. 다들 만화만의 재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본과 기업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내려고 하다보니, 상업성과 작품성으로 만화를 가르려다보니,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선 독립이니 상업이니 나누는 게 또 뭐가 중요한가 싶기도 하고요.
5. 인정할 수 없어!
란: 편집자님께 궁금한 게 있어요. 편집자님이 만드는 오리지널 출판만화에 대해 회사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편: 좋게 여겨주십니다. 오리지널 원고 개발에 대해서 당장 엄청난 세일즈와 수익을 내는 것을 넘어서 장기적으로 보고자 하는,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말씀을 들었어요.
란: 다행입니다. 원고 개발하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일본만화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작업일 텐데 그걸 왜 하세요?
편: 그러면 한국만화는 이제 웹툰 외에는 없는 거잖아요. 그건 안 되고 싫으니까요.
란: 한국만화가 이제 완전히 웹툰 시장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편: 않아서요!
란: 맞아요. 인정하고 싶지 않죠. 아닌데? 아직 출판만화 하는 사람 있는데? 다 넘어간 거 아닌데?
편: 그치만 그런 생각은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나 출판만화가 어떤 유지와 명맥을 이으려고 하는 일은 아니라고요. 제가 출판사를 다니다보니 좀 보수적으로 구는 것도 있는데 그런 태도도 빨리 버려야지 싶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전 지면이라는 그릇에 놓여진 글과 그림과 같은 시각적 요소가 만드는 재미를 극대화하고 싶고, 그걸 고민하고 싶은 겁니다.
란: 그쵸,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재미지 ‘계보’는 아니니까요. 어떤 양식을 잇는다는 의의를 고수하기보다는 웹툰이 거의 대다수인 현시점에서 출판만화는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보일 수 있는지를 같이 고민해야겠죠.
편: 웹이 아니라 책으로 보는 만화는 보다 체험적이 되어야 해요. 그걸 위해서 무얼 할 수 있을지 궁리하며, 이제는 책을 낼 때도 무의미한 굿즈를 줄이고 독자들에게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걸 고민중이에요.
란: 얼마 전에 『도토리 문화센터』 2권이 나왔을 때 문화센터 콘셉트로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진 것처럼요.
편: 맞습니다.
란: 그치만 항상 사은품 만드시던데요?
편: 그런 게 있습니다. 안 만들면 서운한… 꼭 해야 할 것을 안 한 것 같은… 그래도 엽서 한 장 정도는 넣어줘야 하지 않나 하는… (란: ‘엽서는 정말 그만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하는 소신 발언 해도 될지요…)
란: 작가로서는 이제 ‘독립만화만의 무언가가 있다’라는 말은 그만 듣고 싶어요. 허울뿐인 말이 된 듯합니다. 정말 독립만화의 존속을 바란다면 ‘독립 유통’ 외의, 독립만화의 차별적인 성격과 특장점이 무엇인지 찾아야 해요. 그게 무엇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찾고 싶어서 행사를 여는 걸지도요. 하지만 생각하다보면 결국은 ‘사람들이 뭘 재밌어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요. 행사 기획과 준비 과정을 영상으로 남기는 이유도 그거예요. 어떤 사람은 비하인드 스토리나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즐거움을 찾기도 하니까요. (일단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내적 친밀감을 키우거나, 서사를 부여하기도 하고요.
편: 작품성을 위해 대중들과 괴리된다거나, 멀어지고 싶어서 독립과 출판을 하는 게 아니란 거지요. 상업이라 불리는 쪽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고민을 항상 하고 있네요. ‘사람들은 무엇을 재밌어하는가’.
6. 독립만화 행사 ‘칸새’
편: ‘칸새’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나도 독립만화, 1차만화가 뭔지 몰라서 시작했다’라는 말씀이 무척 인상 깊었어요.
란: 행사를 기획한 멤버는 저와 도이님(배우, 비주얼디렉터, 만화가) 우야님(애니메이션 전공, 본인 화실 운영) 세 분인데요. ‘책밭’이라 불리는 행사에서 처음 만나고 그뒤로 연락을 자주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연락이 닿은 우야님이 자기 화실에서 행사를 열고 싶다고 해서 열게 되었습니다. 스타트업 회사를 한번 다녀보니까 좋은 점이, 일은 가능한 한 빨리 진행시키자는 기조가 생겼다는 거예요. 당장 열어보자. 몇 명이나 모이나, 누가 오나, 우리가 확인을 해봐야 본격적인 정규 행사도 기획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 현재까지 총 몇 분이 모집되었나요?
란: 70팀 정도요.
편: 많은데요? SNS를 보니까 개인적으로 작품하시는 분들은 다 오시는 것 같더라고요.
란: 저는 100팀을 예상하긴 했어요. 작품마다 고유한 힘은 있지만 그게 한데 모였을 때 오는 시너지를 무시 못 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이번에 확인해보고 싶어요. 한국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엮어보고도 싶고, 분파를 파악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편: 국내의 여러 북페어나 아마추어 행사를 갈 때마다 한국만화가, 그러니까 작가님과 제가 보고 싶어하는 류의 만화가 주인공인 행사는 없구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칸새의 소식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란: 저는 앙굴렘 만화축제를 다녀왔는데 우리가 프랑스만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 있잖아요? 막상 거기 가서 보니까 그냥 잘 그리는 만화가 그런 스타일이었을 뿐이었어요. 예술만화라 생각했던 분야에도 유행하는 스타일이나 경향성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거기에는 대형, 중형, 소규모 독립 출판사들의 부스가 규모별로 있었는데 독립만화 출판물에도 다 유행하는 주제나 스타일이 있었어요. 그러면 이 판이 유행을 만들거나 그걸 따라서 잘하는 사람은 살아남고, 못하는 사람은 그냥 좀 뜨내기로 있다가 사라지는 게 당연한 수순인 건가 싶었는데…… 아닌데? 아닐걸?? 하는 생각이 역시나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것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어서 여는 것입니다.
7. 칸새의 목표
편: 칸새로 무얼 하고 싶으신가요? 목표가 궁금합니다.
란: 당장 4월에 열릴 행사에서는 스스로를 독립만화가로 자처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본인 스스로 독립만화가로서의 자격을 판단한 사람들의 수를요. 제게 묻지 않으셔도 당신은 이미 독립만화가입니다, 제발. 또 이번에는 일단 ‘책 만드는 사람’을 중심으로 짰습니다. 독립적으로 그려진 만화책들이 어떤 면모를 갖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그다음은 독립만화에서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재미를 찾으며 독립만화가를 조명하는 것입니다.
편: 정기 행사로서는 생각 없으신지요.
란: 올해 두 번이 계획되어 있는데, 정기 행사는 일단 한번 해봐야 알 것 같아요.
편: 칸새가 정기 행사로 자리잡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란: 처음에는 돈이라 생각했는데 요새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동료애입니다. 이 판이 계속 돌아가려면 보는 사람이든 만드는 사람이든 계속 있어야 하는데 관건은 결국 동료애고, 지금 그게 부족한 것 같아요. 자주 연락하는 사람이나 친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어떤 판 위에 서 있고, 그 판 위에 있는 나도, 저 사람도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느끼고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동료애요. “누구는 잘나가고, 팔로워 수가 많고, 외주를 꽤 받는다더라.” 이 판에 있는 사람들이 다 동료인데 그걸 느낄 수 없으니까 서로의 작업물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비교 우위를 따지고, 인정과 자격만 찾고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지금의제가 안 지치려면 동료애가 필요합니다. 돈과 인력은 당연히 필요한 거고요.
편: 하, 인터뷰 말미에 또 나왔습니다. 타이핑하는 제 왼팔에 소름이 돋았지 뭡니까? 이 소년만화적 대사.
란: 근데 이게 ‘모두 다 친구!’ 하자는 건 아니고요..
편: 놀자판은 안 된다…
란: 네, 제가 바라는 건 인맥이 아니라 한국에도 만화 판이 깔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판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인맥이나 네트워크, 그런 건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독립만화가는 해인 편집자님이랑 아는 사이고 친하게 지내면, 자기도 책을 출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편: 그건 정말 오해십니다……
란: 맞아요. 누군가랑 친하다고 잘 풀리고 일이 굴러가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편: 왤까요? 자신이 현재 닿지 못하고 있는 어떤 중요한 인맥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그리고 그 ‘씬’ 같은 곳(?)에 들어가면 일이 술술 풀리고?
란: 하, 그러니까요. 방금 하신 말씀 그대로 인터뷰에 적어주세요. 진짜.
편: 근데 그 인맥판의 중심에 가봤자 아무것도 없는데… 진짜로……
란: 그쵸. 이 판이 그렇게 큰 판도 아니랍니다.
8. 만화의 목표
편: 오늘 정말 두 시간 동안 살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래도 계속 만화하실 거죠?
란: 네…… 제가 예전에 어떤 분께 ‘란탄씨는 진짜 만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 말을 듣고 제 자신에게 열이 받았어요. 절대로, 그 말씀을 하신 분 말고요. 기약 없는 짝사랑을 하고 있단 소리로 들렸거든요. 아니면 만기일이 오지 않는 적금 들고 있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왜 이렇게 미련한지? 혹은 ‘사실 나는 만화를 그만큼 사랑하거나 잘 아는 것도 아닌, 껍데기일 뿐 아닐까?’ 같은 의문에… 물론 그래서 관두고 싶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닙니다.
편: 저도 작년 연말에 어떤 작가님께 정확히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요, 정확히 같은 감정이 들었습니다. ‘와~ 너 이루어지지 않을 짝사랑 되게 잘한다!’ 같은…
란: 그래도 계속 만화하실 거죠?
편: 네……
9. 갈무리
란: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블랙잭』 창작 비화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공전의 히트를 친 데즈카가 더이상 그만큼의 성과를 못 내니까 편집자들 사이에서 ‘이제 와서 데즈카 만화를 연재하자고?’라며 무시했대요. 지나가듯 잠깐 나온 부분인데도 분노했어요. 진짜 나쁜 놈들. 좀 안 팔린다고 데즈카한테 이런 말을 해?
편: 정말 나쁜 놈들이네요. 너네가 『불새』 그릴 수 있어?
란: 근데 그때 편집장이 딱 한 편만 게재해달라고 사정을 해서 실은 게 『블랙잭』이고 그게 빵 터진 거라 하더라고요.
편: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군요. 그러니 지금 그리는 이 만화가, 지금 만드는 이 만화책이 아무도 모르지만 실은 빵 터짐을 목전에 둔 『블랙잭』이라 생각하고 마구 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