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Taiyo Matsumoto / SHOGAKUKAN
“하나만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 나는 네 만화를 정말 좋아해. 처음에는 그리는 사람의 자의식만 가득한, 짜증나는 만화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만화를 만드는 사이에 점점 각별해지더라고. 정말 대단한 작품이구나…하고. 지금, 세계 최고의 만화를 만들고 있다고 믿어.”
만화가들의 만화가,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리는 ‘만화인漫畵人의 삶’, 『동경일일』. 만화잡지의 폐간에도 다시 한번 만화의 세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만화편집자 시오자와를 그린 타이요 작가의 신작이다. 스러져가는 과거의 영광과 사랑, 그것을 여전히 동경하고 꿈꾸는 마음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물며 이 업계는 절망스럽다. 만화는 무섭다. 마음이 소란해지고 멘탈을 무너뜨린다. 그 절망에서 만화가였던 아버지를 헤아려본 금정연 작가는 최근 두 번 울었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은 LG트윈스의 29년 만의 우승을 보면서, 다른 한 번은 『동경일일』을 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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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원고는 진짜 늦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혼자서. 가뜩이나 마감에 허덕이는 만화가들이 잔뜩 등장하는 책이다. 서평까지 마감에 늦는다면 담당편집자님은 두 배로 괴롭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독촉 메일을 받고 말았고,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본다.
2
아빠는 월간지 시대의 만화가였다. 월말이면 조용한 집안을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수화기를 들고 이제 마무리 작업중이라고, 얼마 안 남은 것 같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건 대개 엄마의 몫이었다. 물론 마감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고 전화는 거듭해서 걸려왔다. 그럴 때면 내가 전화를 받아 아빠는 안 계신다고, 언제 오시는지 모르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거짓말을 하곤 했다. 내 나이 7살, 야만의 시대였다…
늘 매캐한 담배 연기 가득하던 아빠의 방. 벽마다 『보물섬』이나 『만화왕국』 같은 만화 잡지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고, 바닥 여기저기 지우개똥과 스크린톤 조각이 널려 있다. 책상 위에는 펜촉과 파이로트 잉크병, 그리고 낡은 라이트박스. 그래, 라이트박스가 있었지. 우유색 유리로 된 윗면이 앞으로 기울어진, 육면체의 나무상자. 스위치를 누르면 안쪽에 설치된 형광등이 켜지며 그 위에 놓인 원고가 환하게 밝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꼭 마법 같았거든.
일을 도와주던 아빠 후배가 좁은 바닥에 상을 펴고 앉아 배경을 그렸고, 엄마는 말풍선 위로 ‘사식’을 잘라 붙였다. 때로는 담당편집자(그때는 기자라고 불렀는데)가 마감이 끝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원고를 받자마자 인쇄소로 달려가기 위해서.
이런 환경에서 내가 마감을 어기지 않고 꼬박꼬박 지키는 작가로 자랐다면, 그것도 조금 이상한 일 아닐까?
3
『동경일일』은 어느새 ‘선생님’이 된 마츠모토 타이요가 처음으로 그리는 만화에 대한 만화다. 원한다면 만화-만화, 혹은 만만화화라고 불러도 좋다. 일단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다(이유는 없음)…
주인공 시오자와는 중년의 만화편집자다. 그는 자주 우산을 잃어버리는 사람, 새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늘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미리 나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깍듯한 존댓말을 쓰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사람이다. 시오자와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창간한 만화잡지가 판매 부진으로 2년 만에 폐간하자 책임을 지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둔다. 떠나는 그를 두고 한 동료는 말한다. “어쩌면 이 업계에 절망한 건지도 모르지.”
망해가는 업계다. 절망한 사람이 시오자와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한때 반짝였지만 이제는 닳을 대로 닳아 나아가지 못하는 중견 만화가 초사쿠, “입만 열면 다른 만화가 험담이나 하고 작품이 먹히지 않는 걸 전부 시대랑 독자 탓으로 돌리”던, 패기 넘치는 신인이었지만 인기를 얻으며 함께 자란 불안에 먹혀버린 신인 만화가 아오키,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스스로의 재능을 믿지 못하고 좀처럼 자신만의 작품을 시작하지 못하는 쿠사카리. 모두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 업계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절망을 이기기엔 역부족이다.
출판만화계를 떠나 학습지의 컷 만화를 그리며 평온한 매일을 보낸다는 늙은 만화가는 말한다. “만화는 무섭거든… 마음이 소란해지고…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디디면 멘탈이 무너져…”
4
90년대가 되며 월간지의 시대는 가고 주간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매주 학교 앞 문방구에서 새로 나온 『아이큐 점프』와 『소년 챔프』를 사서 함께 돌려보았다. 『드래곤 볼』, 『슬램덩크』,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기계전사 109』, 『검정 고무신』, 『짱』… 수많은 만화를 보았지만 거기에 아빠의 만화는 없었다. 몇 년 후 아빠는 만화를 그만두었고(아마도 타의로), 우리를 떠났다(아마도 자의로). 이제 나는 그때의 아빠가 조금쯤 절망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많이. 그리고 그건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다.
5
시오자와는 만화와 거리를 두기 위해 평생 모은 보물과도 같은 만화책을 처분하기로 마음먹는다. 헌책방 사람을 집으로 불러 만화책을 전부 가져가달라고 한다. 복도에 수십 개의 상자가 쌓인다. 땀흘리며 책을 싸던 헌책방 사람이 만화책 한 권을 들고 시오자와를 부른다. 괜찮겠냐고, 희귀한 책이라 다시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할 거라고. 시오자와는 웃으며 말한다. 제발 가져가 달라고. 그러다 잠시 후, 마지막 만화책을 상자에 담아 옮기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린 시오자와는 아무렇게 널브러진 만화책을 바라보다 헌책방 사람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사과한다. 그만두겠다고, 도저히 못 팔겠다고. 말없이 만화책이 든 상자들을 둘러본 헌책방 사람이 말한다. 이해한다고, 자기도 만화를 좋아한다고.
얼마 후, 좋아하던 만화가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시오자와는 생각한다. 한 번 더 만화를 만들어보겠다. 그리고 또다른 절망한 사람들을 찾아 집을 나선다. 퇴직금을 털어서 만들 새로운 잡지에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절망이 있지만 절망적이진 않은 만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마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만화.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만화 『동경일일』은 그런 만화다.
6
처음엔 울었다는 말은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중년의 남성이 만화책을 읽으며 울었다는 사실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고 괜히 읽는 사람의 기분만 망칠 테니까. 하지만 결국은 쓰지 않을 수 없는데, 2권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3권으로 계속”이라는 안내를 보며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건 여기서 끝나다니, 그래서 3권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건데! 하는 절규의 눈물이었지만, 동시에 시오자와와 절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의 눈물이기도 했다. 최근 나는 두 번 울었는데, 한 번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만화화 『동경일일』을 읽으면서였고, 다른 한 번은 LG 트윈스의 29년 만의 우승을 보면서였다.
중요한 건 절망하지 않는 게 아니고, 절망을 이겨내는 것도 아니다.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절망에 먹히지도 않으면서 절망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두 번의 울음에서 내가 배운 교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