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명가, 트리거가 만든 금세기 최고의 히어로 영화 <프로메어>.
영화 속 주인공 리오와 갈로가 구해준 지구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에 오늘도 감사하며
어느 소설가의 성스러운 <프로메어> 간증글을 여기 이곳에 남겨둔다…
※아래 글에는 영화 <프로메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세계각지에서 불꽃을 내뿜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버니시’라고 불리며, 이들이 일으킨 재해는 생존인구의 절반을 불태운 유래 없는 대재앙이 된다. 그로부터 삼십 년 뒤, 버니시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 청년 ‘갈로 티모스’는 소방관이 되어 자치도시 ‘프로메폴리스’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갈로는 염상 테러리스트 조직 ‘매드 버니시’의 수장 ‘리오 포티아’와 대결하게 되는데, 그에게 도시의 사정관이자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 ‘크레이 포사이트’가 버니시로 인체실험을 자행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진위를 따지기 위해 크레이를 찾아가는 갈로. 그는 그곳에서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지구의 마그마가 대분화를 일으키기 직전이고, 크레이는 대절멸의 길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성간이동함 파르나소스호에 단 만 명의 선별 인원만을 태운 채 지구를 떠날 예정이라는 것. 갈로와 리오는 지구의 마그마를 끄고 크레이를 저지하기 위해 로봇 ‘리오 데 갈론’에 올라탄다…
이런 긴 이야기를 통 하나에 빈틈없이 꽉꽉 채워 담는 도시락의 미학을 따르며 <프로메어>는 111분 동안 한숨도 쉬지 않고 (쉬긴 한다. 대략 16초 정도……) 앞으로 달려나간다. 나는 이것을 작년 연말에 보았는데, 갑옷을 입은 리오가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하는 순간부터는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뿐만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뇌가 찌꺼기만 남은 기분이 든다. 매번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 성소년은…… 실재한다……
아. 리오 포티아.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그러고 보니 Lio fotia는 Lolita의 애너그램같지 않은가?). 나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리오가 살아 있음을 설득시키고 싶어서 <허구세계의 존재론>이라는 책을 샀다. (이 책은 90년대를 휩쓴 뇌파학습법을 이용하여 읽고 있다.) (머리맡에 두고 잔다는 뜻이다.)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다면 리오 포티아라고 대답하려고 마음먹었다. 상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 한때 버니시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사람이라고 해야지. 그런데 아무도 내게 그런 걸 묻지 않았고, 그렇게 반 년이 지났다. 그동안 줄곧 혼자 <프로메어>에 대해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자기 전에, 걸으면서, 첫날 밤에 신랑이 돌아오지 않아 그 자리에서 먼지가 된 여자처럼, 줄곧…… 그러다가 김해인 편집자에게 작품 추천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동안 억누른 버니시의 불꽃이 폭주하여 약속된 200자를 넘기고 이렇게 길게 쓰게 되어버린 것이다. (👩💻H편집자(지나가던 버니시) : 죄송합니다. 200자를 누구 코에 붙이려 했던 건지…)
나는 만화를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닌데, 대체로 원작이 끝난 이후 인물들이 어떻게 지낼지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그게 의도든, 아니든 빈틈을 만들어 사람들을 상상하게 한다. 이건 절대신神인 작가가 국물도 남기지 않고 촘촘히 짜낸, 세간에서 말하는 명작이 가진 미덕만큼 훌륭한 미덕이다. <프로메어>는 그걸 가졌다. 거대 로봇이 지구를 주먹으로 패서 불을 끄는 애니메이션은, 어쩌면 생각을 하며 볼 게 아닌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난다. 거대로봇 짱! 하고 웃어넘기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다음을 상상하게 한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마음이 쓰인다.
최근엔 크레이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크레이는 대학생 시절 버니시로 각성한 이후 줄곧 모든 것을 태우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불꽃이 있는 한 버니시의 육체는 무한히 재생한다. 그런데 그는 정신력으로 버니시의 본능을 억제하며 팔 하나를 잃은 채 사는 것을 택한다. 크레이는, 미쳐버린 나머지 유일하게 제정신인 인물이다. (30년간 인류 절반이 죽었는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언어를 뺏고 펭구 세계관에 넣어도 ‘오우!’랑 ‘아아―’만으로 대화가 가능한 강인한 인간의 현신 갈로와 리오에 비해 크레이는 나약하다. 그래서 훌륭한 안타고니스트다. 완전연소 후 크레이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열두 살에 읽은 사랑의 경전 <그놈은 멋있었다>에 따르면 입술을 부비면-_-^ 책임을 져야 하기에, 영화 속에서 입을 맞춘 갈로와 리오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 크레이는? 추방자가 될까, 정계에 다시 복귀할까? 은닉해둔 재산이 있을까? 아니면 휴거 이후의 환매채를 남겨둔 사기꾼과 달리 진실로 스스로를 믿은 실패한 구세주일까? 삼십대에 도시 최고의 지도자가 된 정치꾼을 걱정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더불어 요즘 나의 붐은 작가들이 쓴 <프로메어>의 2차 창작물을 상상하는 일이다. 먼저 보고 싶은 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에리스 알데빗 이야기다. 냉정하고 무서운 형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여동생을 닮은 여자에게 끌리면서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회성 제로 회피형 레즈비언 에리스의 기이한 하룻밤을 그려주면(마지막에 다이크 부치한테 붙잡혀서 양말만 신고 도망 나옴) 너무 웃기고 슬플 거 같다.
정지돈이 쓴 프로메폴리스 도시건설기-여행에세이도 보고 싶다. 그라면 불의 재앙을 두려워하며 화산 근처에 세워진 이 이상한 자치공화국에 대해, 르 코르뷔지에가 꿈꾸었을 법한 병적으로 정돈된 도시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버려 건방진 학자이자, 야심 가득한 군인이자, 무엇보다 이삼십대의 풋내기들이 도시를 계획할 수 있었던 서울과 프로메폴리스를 빗대어 재미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거 같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건 조갑제가 쓴 크레이 포사이트 평전이다. (마치 본 것처럼 선명하여 크레이 조갑제라고 검색도 해보았는데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아서 놀랐다.) 선별시민 조갑제는 성간이동함 파르나소스호에 승선하지만, 크레이의 폭주를 막기 위해 제작된 병기 ‘리오 데 갈로’과 ‘크레이 더 X’와의 싸움에서 우주선이 추락하며 허리디스크가 터져 와병생활을 시작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크레이 포사이트의 암살 소식을 듣고 한때 우리 도시의 희망이었던 젊은 사정관에 대해 쓰……면 좋겠지만 조갑제가 <프로메어>를 볼 확률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내 소설을 읽을 확률이랑 비슷할 거 같다. (봐도 문제라는 거다.) 시작이 반이랬지. 그래서 딱 절반만 내가 쓰기로 했다.
‘두 발의 총상이 울렸다. 한때 도시의 랜드마크이던 사정관의 집무실을 닮은 연쇄형절대동결탄의 첫 탄환이 크레이 포사이트의 오른팔을 맞췄다. 두번째 탄환은 그의 심장에 명중했다. 34년간 품고 있던 자살원망願望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つづく…’
나머지 반은 CHAT GPT가 써줄 것이다. 혹은 이 글을 보고 버니시로 발현한 여러분들이 써주시거나. (제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