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키드: 저 같은 경우는 고등학생 때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는데, 공부도 만화도 모두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가족들도 친척도 제가 만화를 그린다고 하면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만화를 해도 될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중학교 교사셨던 작은아버지가 절 따로 불러내셔서 “그냥 만화 그려.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날 그 말을 듣지 못했으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그런 말이 필요한 아이들의 순간에 응원이 되는 만화를 제작하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왔어요.
불친: 이번 기획에 작가님들께서는 『지역의 사생활99』를 기억해주셨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제안이라며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청소년 독자들을 위한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언제나 작업을 통해 학교 안팎의 아이들을 응원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죠.
편: 『대운동회 2024』. 일단 내로라하는 작가님들을 모셨지 않습니까? 원고 자랑을 마음껏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작가님들로부터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파일을 열어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열두 편의 작품입니다. 지면을 고려하여 참여 작품들의 키워드와 약간의 소개를 공유합니다.
#가정폭력
「비밀은 눈밭에 녹아 없어지게」 (산호 만화, https://www.instagram.com/sanhomaydraw/)
눈 없는 남쪽의 겨울을 떠나 강원도로 가는 두 소녀의 짧은 로드무비.
#경쟁
「육상부 괴담」 (래현 만화, https://www.instagram.com/raehyeoni_/)
몸도 마음도 지친 나는 혼자 체육관에서 울다 어떤 귀신을 만난다.
#대안학교
「논두렁 하굣길」 (김푸른 만화, https://studiokimblue.com/)
두발 자유 때문에 대안학교에 온 나는 시골 생활이 따분하다.
#비교
「나의 그림」 (우이 만화, https://www.instagram.com/o.ouie.e/)
-예술고로 진학한 나는 친구들의 그림을 보고, 내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점점 두려워진다.
#비밀
「어두워지면 동산에서 만나」 (최성민 만화, https://www.instagram.com/saio_comics/)
늘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형 두 개를 달고 다니는 친구 진진이의 이야기.
#어른들의무례한질문
「유주의 수경」 (유영열음 만화, https://x.com/jayuyoung_say)
학교를 자퇴한 내게 중요한 바깥 활동인 수영장이 불편하다.
#오해
「체육복」 (하민석 만화, https://x.com/dalros)
빌린 체육복을 돌려줬는데 친구는 돌려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자존감
「내가 배우고 싶은 건」 (근하 작가, https://www.instagram.com/geun_hah/)
나는 힘든 경험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불안함에 집을 떠나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유도장에서 사범을 맡고 있는 해진과 마주친다.
#자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버선버섯 만화, https://x.com/socksmushroom)
장래 희망 조사서에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던 나.
#전학
「우주를 누비는 고리」 (헤 만화, https://x.com/coolbase__)
엄마의 전근으로 전학을 가게 된 나는 인간관계에서 처음으로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학교생활
「딸랑딸랑」 (심규태 만화, https://www.instagram.com/simkyutae/)
부숴버리고 싶은 친구의 열쇠고리.
#홀로서기
「더 이상 귀신이 무섭지 않았다」 (하호하호 만화, https://www.instagram.com/hahohaho00/)
도시에는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있다.
편: 몇 년전부터 청소년소설 분야는 강세입니다. 『긴긴밤』(루리 저, 문학동네), 『죽이고 싶은 아이』(이꽃님 저, 우리학교) 등 유수의 작품들이 청소년을 타깃으로 출간되어 성인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죠. 만화편집자로서 청소년만화는 딱히 이렇다 할 대표작도, 현재 출간작도 찾을 수 없어서 아쉽고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운동회 2024』 시리즈는 기획의도부터 청소년을 위한 만화라고 하니 더욱 반갑고 응원하게 되는 마음이 큽니다.
『대운동회 2024』는 청소년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기획한 프로젝트로, 단 한 명의 청소년에게라도 만화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운동회 2024』의 작품들이 널리 퍼지기를 희망합니다. 올해 수능일부터 책의 판매를 시작한 뒤, 내년 청소년의 날인 2025년 8월 12일에 온라인을 통해 만화 전문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편: 전문 공개라니, 정말 과감한 홍보 방식입니다. 자꾸 이러시면 전 더 응원하는 수밖에 없어요…
편: 학교의 안과 밖으로 세부 주제를 가르셨는데요. 안을 그릴지 밖을 그릴지는 작가님들이 선택하셨나요? 아니면 출판사에서 제안을 했나요?
출판사에서 제안하거나, 작가님 스스로 선택하시거나, 혹은 두 가지 방식이 중첩되었다가 선택이 바뀌거나 하는 등 작가님마다 다양한 과정을 통해 주제가 선택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안과 밖’ 중 어느 한쪽으로 몰리면 어쩌지? 싶었는데 작가님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달라서 이렇게 겹치지 않을 수도 있구나 신기했습니다.
편: 저도 늘 신기한 부분입니다. 작가님들과 이야기해보면 알게 되죠. 괜한 걱정이었음을…
편: 기라성 같은 작가님들의 라인업에 매번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저도 꼭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작가님들도 얼마나 많았는지. 어떻게 저자를 고르고 섭외하시나요? 기발하고 뜻깊은 기획의도에 참여를 흔쾌히 결정하는 작가님들도 많으시겠지만, 또 모든 섭외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불키드: 삐약삐약북스의 구성원은 불친, 불키드 두 명이고 ‘두 사람이 모두 동의하는가?’에 따라 섭외가 진행됩니다.
불친: 『지역의 사생활99』 두번째 시즌의 작가님들을 섭외할 때, 거절을 여러 번 연달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간중간 한 분씩이라도 승낙을 받았다면 아주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당시 날씨도 힘들어서 더 지치고 힘이 빠졌던 것 같아요. 섭외가 되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는데 계속 섭외 메일만 쓰고 있으면… 현타가 옵니다.
편: 저 역시 무엇보다 생각해둔 라인업이 흔들릴 때의 당황스러움이… 비슷한 고민이랍니다.
불친: 그때 ‘아마 이번에는 더 안 될 것 같다’라고 생각하며 메일을 보냈는데 의외의 수락 메일을 받게 됩니다. 「양산: 키르케고르와 법구경」를 그린 약국 작가님이셨습니다.
편: G.O.A.T의 등장.
불친: 지금도 섭외로 힘들 때면 그때 기억을 떠올려요.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새옹지마라고 하죠? 힘든 날이 오면 좋은 날이 오기도 한다는 걸 그때 체득했던 것 같아요.
편: 또하나 쉽지 않겠다 싶은 건, 한 프로젝트마다 수많은 저자분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다섯 분과 함께하는 앤솔러지를 할 때도 복잡했던 기억이 나는데, 삐약삐약북스는 무려 열 명이 넘는 저자분들과 매번 함께할 때마다 어떨지 궁금합니다(심지어 『지역의 사생활99』은 작품 말미에 들어갈 대담을 위해 인터뷰어까지 섭외를 하셨죠). 전 다섯 작가님을 모아 단톡방을 팠는데, 단톡방에선 다들 ‘좋아요~’ 하시고 저한테 개인톡으로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더 좋겠어요’라고 따로 의견을 말씀해주시는(…) 상황이 발생해서 단톡방은 그냥 공지용으로만 남았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그리고 그뒤로 단톡방은 파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아홉 명의 만화가가 함께하는 『지역의 사생활99』를 처음 시작할 때는 출판사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학교 졸업작품 전시의 위원장을 맡은 기분으로 시작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 아무도 우릴 모르고 우리도 우리를 모를 때였으니까요. ‘만화가 아홉 명이 팀으로 모여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하고, 두 명이 위원장을 맡는다’ 정도였기 때문에 작가님들도 편안하게 참여해주셨고 깔깔깔 하며 재미있게 진행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역의 사생활99』 시즌1이 그렇게 많이 관심을 받을지는 몰랐습니다. 시즌1 이후에는 기대치가 생긴 느낌이라 기획도 디자인도, 운영도 조금씩 어려워졌던 것 같아요. 마치 게임에서 레벌업을 하는데 능력치는 안 오른 채로 레벨만 높아져서, 더 어려워진 보스와 싸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부적으로 여러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편: 저 이 기회에 하나 고백하자면 『지역의 사생활99』 중 잔디롤빵(고형주) 작가님의 「여름방학의 끝에서」를 아마 열 권 이상은 샀을 거예요. 너무 좋아서 사둬놓고 선물하고, 선물해서 없으니 또 사고, 그걸 또 선물하고… 아마 제가 전국에서 「여름방학의 끝에서」를 가장 많이 산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인터뷰를 맡았던 오묘 작가님의 「녹음과 노을」도 처음 읽자마자 감탄했고요. 또 저는 란탄 작가님과 이연숙(리타) 비평가님의 인터뷰도 너무너무 좋아서 여러 권 구매하고 여러 번 읽었네요.
그래서 잡지 《빅이슈》 인터뷰 때 고형주 작가님의 「여름방학의 끝에서」를 언급해주셨던 거군요! 그날 너무 들뜨고 기뻐서 여러 번 편집자님의 인터뷰를 보고 또 봤던 것 같아요. 사진도 찍고 그랬습니다(웃음). 우리의 대고객님이셨군요! 정말 감사드려요… 저희 역시 오묘 작가님의 「녹음과 노을」은 초벌 원고를 받아볼 때부터 너무나 기대가 되었고, 완성작은 예상을 뛰어넘었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말씀하신 란탄 작가님과 리타 비평가님의 인터뷰도 참 좋지요. 시즌3 인터뷰 때는 참여하는 작가님이 희망하는 인터뷰어와 연결해드렸습니다. 덕분에 란탄×리타라는 멋진 인터뷰가 나올 수 있었네요. 저희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인터뷰입니다.
편: 한국에서 ‘일본’만화가 아니라 ‘한국’만화 하기. 힘들죠. 정식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ISBN(서지정보)를 발번 받아서, 정식으로 서점에 유통하고 있는데도 ‘독립’만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 란탄 작가님과도 열띤 이야기를 나눴지만 독립을 어찌 정의할 수도 없고, 정식과 비정식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국에서 한국만화를 하는 게 힘들다는 건 사실입니다.
불친: 최근 새로운 단어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디 만화가’인데요… 오른손에는 펜을 들고, 왼손으로 기타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에서 만화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위 몇몇 작가를 빼고는 스스로 마케팅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SNS도 해야 하고, 릴스(영상)도 만들어서 올려야 하고, 라이브나 리퀘스트 박스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도 잘해야 하고… 만화가라는 창작자가 점점 인플루언서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가는 듯해요. 사실 요즘 저도 안무를 연습하고 있긴 합니다. 한국만 이런 것인지, 타국의 만화가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만화가로 살아남기’ 글로벌 편이 필요합니다.
수익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독립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벌게 된 수익은 넘치지도, 그렇다고 망하지는 않을 정도였습니다. 2022년에 기획중이던 『대운동회 2024』는 시작 전부터 포기해야겠다는 이야기를 서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코로나19로 직접 판매가 어려웠던 북페어 ‘언리미티드에디션’에 부스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삐약삐약북스는 삼 일 동안 천 권의 책을 판매했습니다! (예상 외의 큰 독자의 관심, 그것은 찾아올 수도 있다!) 덕분에 당시에 책을 판 비용으로 『대운동회 2024』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편: 천 권이라니? 이거 진짜 감동 실화네요… 지금 이 부분 읽고 계신 독자분들이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진짜로, 진실로, 우리 독자 여러분들의 구매가 ‘다음’을 만들 동력이자 자본 그 모든 것임을요.
불키드: 사실 속으로는 정말 운이 좋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 좋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더 운이 좋게 훌륭한 작가님들을 만났고… 저희는 크게 잘한 것이 별로 없는데 운이 정말 좋았습니다.
편: 『대운동회 2024』의 펀딩 발송일은 수능일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까지 잘 마무리하시기를 응원합니다. 마무리를 하면서 묻고 싶은 건, 원래 마감이 끝나면 다음 마감이 오고, 수능이 끝나면 금세 겨울, 그리고 또 내년이 오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삐약삐약북스의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불키드: 기획과 아이디어는 생각만 해도 항상 짜릿합니다. 만들고 싶은 재미난 책과 프로젝트는 너무나 많아요. 다만 삐약삐약북스의 구성원은 두 명이고, 출판사 운영도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있어서 이제는 기존에 발표한 프로젝트들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이후 안식년을 일 년 정도라도 가지려고 생각하고 있고요.
불친: 불키드여… 이렇게 말한 그는 2023년에 안식년 갖겠다고 해놓고서는 『음악의 사생활99』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무덤에 가서 몰아 쉬기로 했습니다. 안식년이란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